몽실언니 다이어리/나의 해외유랑기

[중3 겨울, 호주] 중3을 마치고 혼자서 호주 시드니로 떠나다

옥포동 몽실언니 2020. 12. 2. 12:52
어쩌다 외국생활이 이렇게 길어졌는지,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

해외생활에 대한 동경

어린 시절 티비에서 나오던 AFN 방송을 보면서 엄마에게 우리도 미국가서 살자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당시에는 이 방송이 주한미군을 위한 방송인지도 몰랐다.  베벌리힐즈의 아이들, 맥가이버, 케빈은 열두살 등 미국 드라마가 티비에서 자주 방영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시절에는 미국 드라마가 유행이었나보다.  그렇게 외화방송을 보며 나는 외국생활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도 미국가서 살면 안 되냐고 엄마에게 조르곤 했다.  

그러던 내가 해외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이었다.  당시는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외치며 영어교육을 강조하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조기유학이 한창 붐을 일으키던 때였다.  미국, 미국, 이민, 이민 하고 내가 노래를 불렀기 때문일까, 엄마는 미국 이민은 안 가는 대신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미국 NASA 견학 프로그램을 신청해주셨다.  미국 가정에 홈스테이를 하고 지내며 미국 NASA를 방문하고, 주변 동네도 여행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엄마와 비행기를 타고 서울까지 가서 오리엔테이션에도 참석하였는데, 미대사관의 파업으로 인해 신청학생들 중 비자가 제대로 발급되지 못한 아이들이 몇명 있었고 하필 나도 그 학생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나의 첫 미국행은 계획대로 되지 못하고 나는 나이 마흔이 넘도록 미국 국경을 밟아보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혼자서 호주 시드니로 떠나다

미국을 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엄마는 이번에도 어느 광고를 보고 시내에 있는 어느 유학원을 방문하셨고, 거기서 3주간 호주 시드니로 어학연수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에 나를 보내주시기로 하셨다.  갑작스런 계획이었는데, 출국 일정은 더더욱 갑작스러웠다.  엄마가 가셔서 상담받고, 그날 바로 등록한 후 3일 후 출국.  어디 국내 여행도 아니고, 중학교 3학년을 마친 아이가 해외로 떠나는데 준비할 시간이 3일이라니. 부모님의 추진력도 대단하고, 싫다거나 무섭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나선 나도 대단하다. 

3일만에 집을 떠난 정도가 아니라 나는 지방 공항에서 김포공항까지도 나 혼자 떠났다.  당시는 인천공항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이라 김포공항이 1청사, 2청사 등으로 나뉘어 국내선과 국제선이 모두 들고 나던 시절이었다.  유학원의 아저씨가 나에게 김포공항에 내리면 몇 청사인데, 거기서 버스를 타고 몇 청사로 이동을 하면 그곳에서 우리를 안내해주는 다른 아저씨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혼자 잘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나는 “여기서 내려서 이리 나와서 버스 탄 다음에 몇 청사로 가면 되는거죠?” 라고 재차 확인한 후 혼자 갈 수 있다고 했고, 엄마 아버지는 그런 나를 믿고 나를 혼자 보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왜 부모님이 김포공항까지 함께 가시지 않으셨나 이해가 잘 가지 않는데, 그 시절의 나도 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님이 함께 가시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그리 큰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도, 나도 별 일 아닌 것처럼 공항에서 헤어졌으나, 아버지도 긴장을 하셨는지 내가 호주에 가서 쓸 생활비를 건네주신다는 걸 깜빡하고 나를 비행기에 태워보내셨다.  다행히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그 사실을 깨달으시고 공항직원을 통해 돈봉투를 보내주셨다.  갑자기 기내 승무원 아저씨가 “시드니 가시는 몽실님?”하고 나를 부르시더니 봉투를 건네주신 것이다.  하마터면 돈 한 푼 없이 김포공항까지 갈 뻔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후 혼자서 길을 잃지 않고 국내선 청사에서 국제선 청사까지 버스로 이동할 생각에 빠져 있느라 돈이고 뭐고 생각할 틈이 없었다. 

김포공항에 내린 후 긴장되는 시간.  버스에 타서 버스 손잡이를 꼭 잡고 서 있던 기억은 나는데, 짐을 내가 직접 찾아서 들고 이동을 했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머릿속은 온통 김포공항에서 미아되지 않기에 몰두해있었고, 다행히 나는 미아가 되지 않고 국제선 청사에서 나를 기다리던 한 아저씨를 무사히 만났다.  그 아저씨는 나와 함께 떠날 다른 두 아이와 함께였다.  그 아이들은 인천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6학년으로 올라가는 아이들로, 둘은 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 아이들은 부모님의 해외출타도 잦았고, 본인들도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여러번 해 본 친구들로 국제선 비행기 탑승이 친숙했다.  나만 첫 해외여행에, 첫 국제선 비행기를 탑승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생애 첫 국제선 탑승

김포공항까지는 혼자 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집을 혼자 떠난 나였건만, 비행기 안에서는 잔뜩 긴장하여 10시간은 넘었던 것 같은 장시간의 비행 내내 화장실 한번 가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화장실을 쓴다는 것이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화장실이 어디인지, 화장실을 어떻게 쓰면 되는지 물어보는 것이 쑥쓰럽고, 그렇게 내가 국제선 비행기 탑승이 처음인 해외여행 초짜라는 사실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웠던 마음도 컸다.  국제선 탑승이 처음인 게 뭐 그리 부끄러운 일이라고, 한창 자의식만 많고 자존감이 낮았던 나에게는 그게 그리 큰 일이었나보다.  김포공항에서 청사간 이동이야 잠깐이면 되는 일이지만, 나 혼자 덩그라니 비행기에서 열시간 이상 이동한다는 사실도 내게는 무서운 일이었다.  당시까지 나는 집에 혼자 있어본 적도 없는 겁 많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화장실이 참을 만 하니 참았던 것인데, 그래도 참 미련스러운 일이었다.  장거리 국제선을 처음 타 봤으면 이리 저리 둘러보기도 하고, 화장실도 한번 가보고, 화장실을 어떻게 쓰는 건지 모르면 승무원에게 물어봐도 되는 일이었는데. 

장시간의 이동 끝에 시드니 공항에 내린 우리 셋은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자 새로운 아저씨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아이는 한 집에서 같이 홈스테이를 하기로 되어 있어서 그 집으로 이동했고, 나는 다른 아저씨의 차를 타고 내가 홈스테이하기로 되어 있는 집으로 왔다. 아저씨는 그 집 가족에게 나를 데려다주고 바로 떠났고, 그 때부터 나 홀로 3주간의 시드니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