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실언니 다이어리/나의 해외유랑기

[중3겨울, 호주] 중3에 나 홀로 호주에 갔던 이유는..

옥포동 몽실언니 2020. 12. 3. 12:17
훗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중3의 나이에 혼자서 호주를 가서 3주나 있다가 왔다는 사실에 다들 놀라곤 했다.  그러다 보니 별 생각 없던 나의 호주 방문기는 지나고 보니 내 나름의 영웅담이 되곤 했다.  다들 그 시절에 호주를 갔다는 사실보다는, “그 나이”에 “혼자서” 호주를 갔다는 것에 놀랐기 때문이다.  그런 반응을 여러번 접하고서야 나도 내가 그 나이에 혼자서 해외를 다녀왔다는 것이 뒤늦게 놀라웠고, 나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며 스스로도 약간은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그 어린 나이의 아이를 혼자서 해외로 보내셨을까.  그것도 부모님이 가본 적도 없고, 가족이나 지인 하나 없는 곳에 만 15세의 여자아이를 덩그러니 보내다니.  

추측건대, 당시 유행하던 조기유학을 보낼 형편은 안 되고, 부모님이 함께 갈 형편도 안 되고, 그렇다고 온 가족이 함께 갈 형편도 안 되는데, 딸 아이는 외국 한번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마침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 전에 시간이 있는데다가, 마침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날짜에 유학원에서 추천하는 프로그램도 있으니 보내게 된 것 같다.  

그 시기는 모두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선행학습을 하느라 “수학의 정석”을 열심히 배우고 풀던 시기인데, 나는 중학교 3학년 2학기 내내 몸이 아파서 공부는 커녕 학교 숙제도 제대로 해 가지 못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3, 2학기는 모두들 고등학교 입학/배치고사인 ‘연합고사’ 준비에 한창일 때였는데, 나는 연합고사 대비 문제집을 단 한권도 풀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아파서 내내 엎드려 있다가 집에 왔고, 집에서는 열이 나서 끙끙 앓으며 잠만 자다가 엄마가 입에 넣어주는 약과 밥만 겨우 먹고 다시 자는 게 일상이었다.  한창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던 시기, 나는 내가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가 죽었을 때에 대비해 내 일기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한밤 중에 잠이 깨면 혼자서 일기를 쓰다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 방에서 이불킥을 할만한 부끄러운 장면이지만, 당시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로 유명했던 “초희”의 이야기가 열다섯의 나에게는 마치 나의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당시의 나로서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 공부를 곧잘하던 나였건만 모두들 열심인 배치고사 공부를 나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으니,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겁이 나서 고등학교 지원 서류에 희망학교를 세 곳 적은 후, 인문계에 탈락했을 때 종합고등학교라도 갈 것인지 묻는 항목에 “네”라고 체크 표시를 했다.  내가 작성한 그 원서를 본 우리 엄마는 “니가 종고 (종학고등학교)를 가긴 왜 가!” 하고 소리를 지르셨던 기억이 있다.  “시험 떨어지면 어떡해.. 거기라도 가야지..” 하고 나는 개미목소리로 대답했던 기억.  

나의 이런 병약했던 상황과 불안한 마음상태를 지켜보는 엄마 마음도 많이 답답했던지, 어느날 엄마가 말씀하셨다. 

"어차피 이번 방학에 공부하지도 못 할 거, 외국이나 나갔다 오지 뭐.” 

아이 넷을 키우는 부모에게 2-3주간의 단기연수이긴 해도 아이 하나를 외국에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고 사용할지, 아이 둘을 키우는 나도 벌써 이리 쪼달리는데, 우리 부모님은 어떠셨을까. 

몸이 아파서 남들처럼 수학의 정석을 풀면서 열심히 선행학습을 하지도 못할 거, 차라리 외국이나 나갔다 오자고 호주를 보내주셨는데, 그렇게 떠난 호주 생활에서 내가 배워온 것은 영어가 아닌 의외의 것이었다.  뭔지 궁금하시다면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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