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8년 4월 6일 금요일. 출산 4개월만에 친정엄마가 처음으로 방문하셨다.
'셀프웨딩'에서 '셀프산후조리'까지.. 우리 부부가 '셀프'에 집착했던 이유는 결혼 4개월 전 우리 아버지의 자전거 사고로 인해 친정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자전거로 강변을 달리기를 즐겨하셨는데, 어느 청명하던 가을날 기분좋게 자전거 도로를 달리시다가 모터를 장착한 탈것을 탄 30대 초반의 남자가 전방주시를 하지 않고 뒤에 오는 부인에게 이야기를 건네다가 자신의 핸들이 꺾인 것을 모르고 빠른 속도로 우리 아버지를 향해 질주해버렸다. 그렇게 72세의 우리 아버지는 자전거에서 몸이 튕겨나가 그대로 공중에 붕 떴다 도로에 내동댕이쳐졌고, 헬멧착용 덕분에 두부손상은 피했으나 경추의 거의 모든 뼈들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구급차에 실려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신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일주일간 입원해있으시다가 7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으셨다.
사고 소식을 뒤늦게야 접했던 나는 곧바로 '빨리 결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독립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에 짐을 덜어드리는 일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동물적인 생각인지는 몰라도 '우리 식구를 늘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 사고 보름 전에 우리는 이미 양가에 각자 인사를 드렸던 터라, 이런 저런 사정 이야기와 함께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겠노라 양가에 알리고 영국에서의 결혼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결혼식 후 닷새만에 우리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산후조리도 스스로 해결하기로 계획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산산조각이 났던 고령의 신체의 회복은 생각만큼이나 더뎠다. 사고 1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아버지는 여전히 통증에 시달리고 계신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너무나 커서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며 괴성을 지르며 밤에 잠을 깨고는 하신다.
그런 상태에 계신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곁에서 함께 불안한 마음에 마음을 졸여가며 지내고 계신 어머니께 우리를 위해 10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이 먼 나라까지 와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한국에 가서 아이를 낳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삭의 몸으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는 것도 불안했고, 아이를 낳고나서 갓난쟁이를 비행기에 태워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달, 두달, 세달의 시간을 우리 부부의 힘으로 버티고 버텨왔다. 그러나.. 100일이 되기도 전에 아이의 체중이 8킬로, 9킬로를 넘어서더니 10킬로까지 찍어버렸고, 버둥거리는 아이와 하루종일 씨름하다 보니 내 체력도 고갈됐다. 심리적으로도 너무나 힘들었다. 애가 울어도 내 탓, 아이가 트림이 걸려도 내 탓, 아이가 잠을 안 자도 내 탓, 잠투정을 해도 내 탓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무릎이 찢어질 듯했고, 아이를 안을 때마다 엉덩이를 받치던 오른팔도 찢어질 듯한 통증에 시달렸고, 허리도 끊어질 것 같았다.
매일 울었다. 아마 아기가 14주가 되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힘겹게 하루를 시작했고, 낮에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가족들에게는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었다. 힘들다고 하면 다들 마음 아파 할 것 같아,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내 마음을 토로하지 못했다. 그렇게 참고 참다가.. 결국 언니를 붙들고 엉엉 울었고, 다음날은 엄마에게 혹시 영국에 와 줄 수 없느냐고 말을 꺼냈다가 엄마가 아직 아버지 두고 가기도 힘들고, 아버지가 함께 가기도 힘들어서 힘들 것 같다고 하시는 통에 또 울었다. 그 다음날 나는 또다시 엄마에게 전화해서 울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 딸이 애를 낳고 이렇게 힘들다고 하는데, 정말 못 와주느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한테 뭔 말도 안 되는 어거지를 쓰며 울었던 것 같다. 나 너무 힘들다고. 온 몸이 다 아프다고. 엄마가 엄마 맞냐고, 철없는 사춘기 시절에나 할 법한 소리를 엄마에게 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전부터 엄마 혼자라도 다녀오라고 하셨다. 언니에게 들으니, 아버지의 건강이 우려되었던 엄마는 아버지께서 이러면 이런다고 잔소리, 저러면 또 저런다고 잔소리를 하셨던 통에 아버지도 엄마로부터 좀 자유롭게 혼자 있고 싶으신 마음이 있으셨다고 한다. 가족들의 설득 끝에 엄마는 영국행을 결심했고, 지난주 수요일에 결정을 내리고, 목요일에 표를 사서, 금요일에 출국을 하셨다.
금요일 밤에 도착하신 엄마는 자고 있는 손주를 굳이 데리고 내려오라 하셨다. 할머니가 왔으니 당연히 한번 안아봐야 하지 않냐며 고집을 피우셨다. 틴틴은 잠든 잭을 품에 고이 안고 내려왔고, 엄마가 아이를 넘겨받아 안으셨다. 눈물이 왈칵 났다. 아이를 낳고 나의 엄마가 나의 아이를 안는 첫번째 순간이었다.
아이를 재우며 준비한 황태누룽지탕을 엄마와 틴틴에게 내어놓았다. 엄마도, 틴틴도 맛있게 먹었다. 엄마의 짐정리는 다음날로 미루고 그렇게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고, 잠자던 중에 갑자기 깨게 된 잭은 그날 밤 밤새 칭얼거리며 2시간 간격으로 일어나며 나와 틴틴을 힘들게 하였다. 그렇게 우리 네사람의 3주간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엄마는 당장 아이를 업으셨다.
그리고.. 아이를 업은 채로 동네를 거닐으셨다. 난생 처음 '어부바'의 맛을 본 아이는 서서 보는 세상을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구경하였다.
아이를 위해 동요도 불러주시고,
유축해둔 모유를 젖병에 담아 틴틴보다 더 능숙한 솜씨로 아이에게 우유를 먹여주셨다.
첫 이틀은 아이를 돌보는 세 사람이 모두 너무나 피곤하였다. 엄마는 장시간 비행으로 인한 피로와 시차적응으로 힘드셨고, 나는 틴틴이 공항에 엄마를 픽업하러 간 동안 혼자서 육아를 담당하며, 또 그날 밤 밤새 칭얼대었던 잭을 달래느라, 그리고 혹여라도 엄마가 힘드실까봐 엄마를 배려하고, 장모와의 첫 동거가 불편할지 모를 틴틴을 챙기느라 그렇게 피곤하였다. 틴틴은 틴틴대로 한주간의 피로와, 금요일 밤 공항으로의 장시간 운전에, 장모님 챙기랴, 나 챙기랴.. 그렇게 세 사람 모두가 힘든 주말이 지났다.
그리고 돌아온 월요일부터.. 우리 셋은 서로에게 적응하며, 편해지며, 아이를 함께 돌보며 지내게 되었다. 역시 경험자의 육아스킬은 '넘사벽'이었다. 그야말로 한 수 위.. 아니.. 그야말로 고수셨다. 그러나..잭의 체중과 예민함, 낮잠을 잘 자지 않음과 심한 잠투정에.. 아이 넷을 거뜬히 키워내셨던 우리 엄마도 혀를 내두르시기는 했다.
그렇게 친정엄마와 함께한 시간의 이야기는.. 다음에 더 자세히 적도록 하겠다.
엄마, 먼 길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사랑합니다~! 낳아주셔서, 또 이렇게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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