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옥스퍼드 St Mary's Church의 타워에서 내려다본 High Street 전망 by 옥포동 몽실언니)
학생과 지역주민간의 갈등은 계속되어 1355년 2월 10일, 이틀에 걸친 St Scholastica Day 폭동으로 63명의 학자와 30명의 지역주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 후 옥스퍼드 시장과 시의원들은 사죄의 뜻으로 St Scholastica Day 마다 거리를 행진하며 죽은 학자 한명에 대해 1페니의 벌금을 내야했다고 합니다. 470년간 이 참회가 지속되었으며 1825년에 시장이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끝났다고 하네요. 이런 역사를 보면 옥스퍼드가 참으로 학생과 학자 중심이며, 매우 보수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 때는 영국이 내전을 겪던 시기입니다.
옥스퍼드 대학은 영국의 Civil War 시기에 왕의 통치를 지지하는 왕당파였고 Charles 1세는 의회를 반대하는 반의회의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내전 당시 1642-1646년은 첫번째 내전이 있던 시기로, 옥스퍼드는 왕당파였으나 지역주민은 의회파였는데 (대학과 지역주민간의 갈등이 지속되었겠죠), 찰스 1세 왕정은 내전으로 인해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Christ Church College)로 피신하여 이 곳을 궁을 대신하여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1648-1649년 시기는 두번째 내전이 있던 시기로 찰스 1세 지지자와 의회파 간의 갈등이 있었고, 1649-1651년 세번째 내전에는 Charles 2세 왕당파와 의회간의 내전이 있다가, 1651년 9월 1일 우스터 전쟁 (Worcester War)에서 의회파가 승리하며 내전이 종결되게 됩니다.
잉글랜드 Civil War는 영국정치에서 의회가 군주에 대항한 첫번째 사례이자, 이후 1688년에 일어난 명예혁명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옥스퍼드에서 Oxford Movement (1833-1845) 가 일어난 시기입니다. 이 운동은 영국 성공회 (Anglican Church)에 카톨릭 요소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음. 그러한 운동의 지도자 John Henry Newman 은 1945년에 로만카톨릭으로 전향하고, 후에 추기경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개혁된 독일대학의 모델이 주요 학자들 통해 (e.g. Edward Bouverie Pusey, Benjamin Jowett and Max Muller) 옥스퍼드로 유입되기도 하였다고 하네요. 그래서 옥스퍼드를 돌아다니다 보면 Pusey Lane이라든지 Jowett Walk 같이 이들 학자들의 이름을 딴 길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9세기 이후 근대화 과정
1878년, 옥스퍼드에서 여성을 위한 칼리지 설립이 이루어집니다. 초기 여성 칼리지들은 Lady Margaret Hall (1878), Somerville College (1879), St Hugh’s (1886), St Hilda’s (1893), St Anne’s (1952) 입니다. 이러한 칼리지들의 홀 (식당)을 들어가보면 여성학장들의 초상화가 많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20세기 초기까지 옥스브릿지 (옥스퍼드와 케임브릿지를 함께 부르는 말)는 남성중심적 사회였습니다. 1920년이 되어서야 여성들도 대학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으니,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죠?
과거에는 여성 정원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1927년에 여학생이 남학생의 25%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을 걸었으며, 이는 1957년이 되어서야 폐지되었습니다. 서구 사회에서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게 된 게 이렇게 역사가 짧습니다. 어쨌든 1970년대까지 옥스퍼드의 모든 칼리지들은 남성/여성 칼리지로 나뉘어져 있었으므로, 총 여학생들의 숫자는 여자칼리지들의 정원수에 따라 제한되었습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모두 함께 다니는, 소위 남녀공학 칼리지가 생긴 것은 더더욱 최근의 일입니다. 1974년에, 남자 칼리지였던 5개의 칼리지가 여학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Brasenose, Jesus, Wadham, Hertford and St Catherine’s). St Hilda’s College 가 가장 최근까지도 여성 칼리지로 남아있었는데, 딱 10년 전인 2008년부터 남학생을 받기 시작했지요. 이로써 옥스퍼드의 모든 칼리지가 혼성 칼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학생의 숫자가 더 많아서 1988년에도 학부생의 40%만이 여학생이었고, 2012년에는 여학생 46대 남학생 54의 비율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남학생이 더 많습니다.
20세기 중반에는 많은 유럽대륙의 학자들이 나치주의와 공산당을 피해 옥스퍼드로 와서 자리잡기도 했다는 역사가 있다고 합니다.
* * *
맺음말
오늘은 13세기에서 근대화 과정까지의 옥스퍼드 대학 역사에 대해 올려봤는데요. 제가 관심있는 사실들을 중심으로 적어본 거라 다른 분들께는 얼마나 흥미로운 정보였을지는 모르겠네요. 학위가운의 기원이 되는 가운이 저렇게 오래된 역사가 있는 옷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당시로서는 학자/학생의 남다른 신분의 표상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옥스퍼드는 영국 내전 당시 의회설립을 반대하고 왕의 통치를 지지했던 보수적인 역사를 가진 도시라는 점, 종교에 있어서도 영국의 성공회에 다시금 로만 가톨릭의 성격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있었던 보수성을 가진 도시라는 점이 제 흥미를 끌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성의 입학이 허가되고, 여성의 정원이 늘어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라는 점두요.
다음에는 옥스퍼드 대학에는 얼마나 많은 학생이 다니는지, 외국학생들은 국가별로 비중이 어느 정도 되는지에 대해 올려보도록 할게요.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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