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일상

5월, 영국이 가장 예쁜 계절이 왔다.

옥포동 몽실언니 2025. 5. 17. 20:02

영국은 5월이 정말 예쁘다.  부활절이 지나고 꽃이 활짝 피는 시기. 

부활절 즈음해서 사과나무에 사과꽃이 만발했다가, 사과 꽃들이 지나고서부터 가든에 있는 다른 꽃들이 열심히 꽃망울에서 꽃을 틔웠다.  아빙던에서 우리 집으로 이사오고 나서 힘든 일들이 많았다.  그 힘든 시간을 버티는 데에 지금 집의 넓은 가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가든이 없었더라면 그 힘든 시간들이 얼마나 더 힘들었을지 상상할 수가 없다.  탁 트인 가든 공간, 봄이면 예쁜 꽃과 나무 덕분에 항상 다람쥐와 새들의 놀이터가 되고, 봄과 여름이면 나이와 벌들이 날아드는 곳.  영국에 살면서 힘든 점이 많지만, 그래도 영국 우리 집에 이런 공간을 두고 살 수 있다는 것 덕분에 영국의 힘든 삶이 버틸만 하다. 

지난주 반짝 날씨가 좋더니, 어제는 갑자기 다시 날씨가 추워졌다. 나도 겨울 패딩을 다시 꺼내 입고 아이들 등하교를 시켰다.  흐린 하늘 속에 가든을 바라봤는데, 가든에 핀 꽃이 마치 환한 전구를 켜둔 것처럼 빛이 나고 있었다.  흐린 날씨에 더 빛이 나는 꽃이라니.  한국의 쨍한 햇살 아래에서는 저 꽃이 어떤 색으로 빛날까.  한국의 쨍한 햇살, 그리고 그 햇살 속의 자연의 모습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신해철 노래의 "도시인" 가사에 나오는 도시인처럼만 살아서 일상 속에서 자연을 느낄 기회가 잘 없었던 것 같다. 

날씨가 흐리니 기분도 가라앉았는데, 그 흐린 공간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꽃이 너무 예뻐서 가든으로 나갔다.  그리고 우리 집 가든에 핀 꽃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이들의 예쁜 순간을.  그리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예쁨을. 

3년 전 이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때, 그 때 집 앞에 환하게 핀 장미를 보고 첫째 잭이 좋아했다.  색이 예쁘고 모양도 탐스러워서 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꽃을 만졌다.  바로 아래의 장미들이 문 앞에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손 대기 무섭게 입사귀들이 떨어져서 남에 집 꽃이니 함부러 만지면 안 된다고, 나중에 이 집이 우리집이 되거든 그 때 마음껏 만지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그 집에 우리가 지금 3년째 살고 있다.  그래서인가 5월이 되어 그 장미가 다시 피어오를 때면 항상 이 집을 처음 보러 온 순간이 기억난다.  

날이 흐린 날, 나 혼자서는 가든을 잘 나가지 않는 편인데도 흐린 하늘 속에 나를 불러들인 빨간 전구 같은 장미. 회색 하늘과 흐린 공기 속에서 다홍색의 장미가 더 밝아 보였다.  흐림 속에서 더 빛나는 아이.  

빨간 꽃 앞에는 이렇게 노란색 꽃들이 펴 있어서 더 대조를 이뤘다. 남편이 심어서 예쁘게 가꾸고 있는 꽃.

예전에는 장미를 심는 게 유행을 했던 모양이다.  할머니들이 사시던 집들 가든에는 장미가 많이 심어져 있다.  우리 집에 사시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가든 사랑 덕분에 우리가 해마다 예쁜 꽃을 보고 지낸다.  이 다홍색 꽃들이 이렇게 만개한 것도 처음보는 것 같다.  가든을 사랑하는 남편이 틈만 나면 가든을 가꾸는 덕분에 올해 가든의 꽃들이 유난히 더 밝다.  틴틴, 고마워요!

너무 예쁜데 그 모습을 어떻게 사진으로 담아야 할지 몰라서 이리 찍고 저리 찍고..

어떻게 저렇게 꽃 색깔이 눈부실수가 있나 감탄하며 바라본 꽃들인데, 사진 속에서는 현실 모습만큼의 빛을 발하지 못한다. 내 사진 찍는 기술이 부족한 모양이다. 

가든 초입에 있는 분홍 장미. 어제만해도 꽃망울이 엄청 많이 자라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꽃을 잔뜩피웠다.  나중에 저 꽃망울들에서 꽃이 피어오를 때 다시 사진을 찍어봐야겠다.

딸기를 좋아하는 아이들.  딸기 모종을 사서 심은 게 다행히 죽지 않고 올해도 딸기 열매를 맺고 있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건 거의 없고, 달팽이와 새들의 밥이 된다. 

이건 영국에 흔한 잡초, 버터컵

아래의 두 꽃은 뒷편 나무에 핀 꽃. 

다시 장미.. 

이건 아이들이 키우고 있는 블랙베리.  아빙던 집에서는 블렉베리가 정말 잘 자라고 맛도 달아서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는데, 이 집에 와서 우리가 직접 심어 키우고 있는 블랙베리는 아직 제대로 된 수확 한번 못했다.  한 두개 먹을 만한 것들도 아빙던 집 블랙베리만큼 달지 않아서 아이들이 즐기지는 못한다.  그래도 자신들이 직접 골라서 산 모종을 심어 키운 것이라 그런지 아이들의 애정은 남다르다. 

남편이 심어서 가꾸는 라벤더. 남편이 올 봄에 주변 잡초 제거를 해줘서 그런지 꽃들이 유난히 더 예쁘게 잘 자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작년 해충 피해를 입은 꽃나무. 올해도 해충에 둘러싸여있지만 남편이 계속해서 관리를 해주고 있다. 하얗게 올라온 꽃들이 분홍색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 

이번 부활절 방학에 남편이 사과나무에 그네를 달아줬다.  아이들이 가든을 더 잘 이용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꽃을 틔운 보라색 붓꽃. 예전엔 키가 저렇게 크지 않았는데, 올해는 첫째 잭만큼이나 크게 자랐다.  꽃을 정말 좋아하는 잭.  붓꽃과 사진을 찍어줬더니, 자기도 사진을 찍고 싶다고 내 핸드폰을 들고 가서 사진을 찍었다.  꽃 사진도 찍고, 가든 사진도 찍더니 엄마도 찍어주겠다 하며 내 사진도 찍어줬다. 아이가 내게 카메라를 들이밀면 내가 아이들 사진을 찍을 때 아이들 기분은 어떨지 실감하게 된다.  아이가 핸드폰 카메라 설정을 어떻게 한건지, 배경은 하얗게 지워진 흑백사진이 만들어졌다. 내가 찍은 아이의 사진 속 표정과 내 표정이 묘하게 닮아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왼쪽처럼 꽃이 활짝 핀 모습만 찍었는데, 아이가 찍은 사진을 보니 아래 우측의 꽃망울 사진도 담겨있다.  꽃을 틔우려고 준비하고 있는 이 작은 꽃망울에도 관심을 줄 줄 아는 아이. 

오늘 아침에는 아이들 둘 다 늦잠을 자고, 잠이 덜 깬 채로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두 아이 모두 멍하게 가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늘 하는 것.  나와 틴틴도 거실에 앉아 가든을 멍하게 바라볼 때가 많은데, 아이들도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것을 보니 신기했다.  저 어린 아이들에게도 가든이 눈길을 사로잡고, 마음에 평화를 주는 것은 마찬가지인가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에서 사는 게 힘들다고 생각했다.  가든이 아름다운 계절이 오자 지금 사는 집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불평불만할 때가 많았던 내 모습에 반성했다.  소중한 것에 대한 감사를 잊고 살 때가 많았음을... 우리가 아이들과 평안하게 지낼 수 있는 우리만의 집, 우리에게 필요한 충분한 야외공간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음이 더없이 감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항상 감사하며 지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