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일상

기후변화가 가져다 준 선물: 가든의 사과 풍년

옥포동 몽실언니 2025. 10. 23. 07:15

기후변화는 위기이다. 그런 위기가 가져다 준 선물이라니. 제목을 쓰면서도 이게 적절한가 셀프 검열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걸 그럼 달리 뭐라고 표현할까.

 

영국 더위 변천사

기후변화로 영국의 여름이 계속해서 더워지고 있다. 내가 영국에서 보낸 첫 여름은 2008년이었다. 그 여름을 거치고 난 결론지었다. 영국에는 여름이 없다고.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다닌 날이 여름 중 이틀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런 날씨를 두고 어찌 여름이라고 부르겠냐고 생각했다. 

그리고 2009년. 그 때는 좀 더 더웠으려나. 한 차례 여름을 겪어본터라 여름이 더울 거라는 기대는 사라졌고, 여름에도 항상 외투를 들고 다니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가을이 되기 전 한국으로 필드웤을 떠났다. 

그렇게 여름이 여름답지 않던 영국이 이제는 제법 더워졌다. 우리 가족이 아빙던에 살던 시기 (2017년에서 2022년)만 해도 여름은 일주일이라고 생각했다. 한 일주일 바짝 덥고나면 더운 여름은 끝이었다.

영국 여름은 정의가 달랐다. 내가 경험한 영국 여름은 건조하고, 해가 쨍하며, 산들바람이 부는 날씨. 저녁 9시가 되도록 해가 지지 않는 날이 긴 시기가 여름. 기온이나 날씨로 여름을 정의하기 보다는 해가 긴 시기를 여름으로 정의하는 게 더 적합했다. 

그러던 영국에도 기후변화가 찾아왔으니, 여름이 더 더워졌다. 2010년 초반만 해도 낮기온이 28도만 올라가도 연일 뉴스가 시끄럽고, 실제로 그 더위에 노인들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었다. 28도에 사람이 사망한다는 게 한국 사람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영국은 여름이 짧고 선선하다 보니 당시만 해도 집에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 조차 하나도 없는 집도 많았고, 그런 상황에 28도 온도는 노약자들을 탈수와 실신의 위험에 노출시키기에 충분하다.

나도 영국에서 살며 첫 십 년 동안은 선풍기 없이 살았다. 커튼으로 낮에 드는 해를 잘 가리고, 방 안이 좀 덥다 싶으면 부채를 이따금 사용하거나, 시원한 물수건을 목에 걸고 있으면 참을 만했다. 게다가 그런 더운 날씨가 며칠 밖에 없으니, 나름 그 더위조차 소중해서 절대 불평할 수 없었다.

그랬던 영국이 이젠 여름에 30도를 찍는 날이 여러번 있다. 영국에 처음 온 2000년대 후반만 해도 영국 여름은 이틀, 사흘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게, 일주일로 늘었다가, 급기야 이주일로 늘었다.

올해는 9월에도 더운 날이 며칠 있어서 영국 살며 처음으로 "세번째 히트 웨이브"라는 말을 들어보았다.

이렇게 기후변화로 영국의 여름은 점점 더워지며, 집에 이동식 에어컨을 설치하는 사람도 늘었다. 우리도 내년 여름엔 이동식 에어컨을 하나 미리 장만해서 여름을 쾌적하게 나는 게 어떨지 틴틴과 진지하게 얘기 중이다. 

 

기후변화가 준 선물: 빨갛게 잘 익은 사과들

이렇게 길게 기후변화로 영국 여름이 길어지고, 더 더워졌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그 덕분에 가든에서 자라는 사과나무들의 과실이 더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영국 주택들에는 오래된 사과나무들이 많다. 과거 한때 집에 사과나무를 심는 것과 장미를 심는 것이 유행을 한 것인지, 지금 사는 동네에는 특히나 집집마다 사과나무와 장미가 많다. 다들 가을이면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데, 올해는 더운 여름 덕분에 사과 과실이 빨갛게 예쁘게 익고, 당도도 높아져서 모두들 최고의 수확이라며 이웃들마다 사과를 나눠줬다. ㄹㅂ네 사과를 한봉지 가득 받아서 정말 맛있게 잘 먹었는데, ㅁㅇ이네 사과도 정말 맛있어서 첫째 잭은 학교 간식으로 항상 그 집 사과를 하나씩 가져갔다. 앞집 ㅇㅅ 아저씨도 사과를 한봉지 갖다줬다. 모두들 올해 특히 사과가 달고 맛있다며 사과 나눠주기를 마다않았다. 이웃들이 나눠주는 사과의 맛에 깜짝 놀란 우리는 우리집 사과도 달고 맛있게 자랐기를 바랬다. 그러나 DNA는 어쩔 수 없는건지, 우리집 사과는 이 더위에도 당도가 올라가진 않았다. 우리집 사과는 아무리봐도 요리용 사과가 맞는 것 같다. 신맛이 강해서 그냥 먹기는 힘들고, 설탕을 넣고 버무린 디저트를 만들어야 제맛이다. 올 여름에는 차 사고에, 한국 방문에, 돌아와서는 나도 내내 몸이 안 좋아서 우리집 사과를 돌볼 경황도 없었다. 뒤늦게 이웃들의 사과를 맛보며 우리집 사과도 좀 나눌 수 있을까 하고 사과를 주워모으기 시작했다. 우리집 사과는 이렇게 단맛도 없고 시기만 한데도 썩지 않는 것을 찾기가 힘들다. 땅에 떨어진 나무들은 이미 속이 썩어있는 경우가 많고, 나무에 달린 사과도 새들이 쪼아먹어서 상처 없이 멀쩡한 놈을 찾기가 힘들다. 그 와중에 몇 개 아주 실한 사과를 주운 날, 사과가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었다. 이 집에 이사와서 세번의 여름을 보내며 사과를 맛봤는데, 여전히 신맛이 강하긴 하지만 신맛이라도 맨 입에 맨 사과를 넣어서 맛이라도 볼 정도의 당도라도 생긴 것은 놀라운 변화다.  하루는 썩지 않은 사과를 세개나 수확해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올해 난 사과들로 미인대회를 한다면 진선미가 되시겠다. 내가 사진을 찍자 틴틴이 크기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며 레고 피규어를 옆에 세워뒀다. 추석 차례를 지내지도 않지만, 차례상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사과들이다. 랩에 잘 싸서 냉장고에 잘 넣어뒀다가 시아버님 첫 기일에 이 사과들을 두고 제사라도 올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 집에 이사와서 사과나무에 사과 열린 것을 3년째 보고 있는데, 이렇게 나무에 달린 사과가 빨갛게 변한 건 올해가 처음이다.  그러니 어찌 기후변화가 준 선물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위 사진에도 자세히 살펴 보면 아래에서 두번째 있는 사과는 새들이 한쪽을 이미 다 파먹은 것을 알 수 있다.

올해, 그간 가장 더웠던 영국 여름이 지나고, 내가 영국에서 경험한 10월 중 가장 온화한 10월 초를 보냈다. 10월 말에 접어들며 이제서야 영국답게 매일 비가 내린다. 오늘 저녁에도 비, 내일도 비. 

또 비냐고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이렇게 비가 와야 영국이지. 2주가 넘는 여름을 선물받았는데. 

기후변화도 우리 동네 사과가 맛있어진 건 좋지만, 기후위기는 기후위기인지라 그로 인해 수확에 문제가 생기고 있는 작물들을 생각하면 마냥 좋아하기만 할 일도 아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걱정인데, 사실 정보가 많이 없어서 구체적으로 걱정이 들지가 않는다. 한심한 노릇. 

애들이 개학해서 학교에 가고 (이번주, 다음주 2주간 아이들은 방학 중), 내 몸도 좀 회복하고 나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관심을 좀 더 가지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