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혼자 있는 조용한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기긴 했어도 밤새 아이 때문에 잠을 설친터라 졸리기도 졸리고, 낮동안 해야 할 일도 많고 해서 여유다운 여유를 부릴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 여유를 오늘 한번 부려볼까 싶었는데, 또 예상치 못한 일이 갑자기 생기는 바람에 여유 부리려고 폼 잡던 중에 바로 방으로 올라와 컴퓨터를 켜야 했다.
오늘로 아이 어린이집 4주 3일차 등원이다. 정식 등원 전에 3회의 적응세션과 또 한번의 주1 회 등원을 모두 합하면 어린이집 간 날이 총 16일이다. 그 날들 중 딱 두번 정도 남편과 동행했고 나머지는 나 혼자 아이를 데려다 주고 왔다. 원래 계획은 남편이 데려다 주고 바로 출근하는 것이었으나 차가 한대 뿐인 우리 집 사정상 그렇게 되면 아이를 데리러 갈 때 내가 남편 회사로 걸어가서 차를 갖고 아이를 픽업해야 하다 보니 그냥 나 혼자 아이를 드랍오프, 픽업하고, 남편은 조금이라도 일찍 회사에 출근해서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거나, 정시에 퇴근하더라도 여유롭게 일을 잘 마무리짓고 퇴근해서 집에서 마음이 편한 편이 나으니 나 혼자 아이를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게 되었다.
다른 날은 내가 아이를 데려다주고 와도 항상 남편이 집에 있었는데, 오늘은 남편이 출근했다. 내가 하라고 한 것이다. 일찍 가서 일찍 오라고. 나 기다리지 말고 그냥 출근하라고.
그렇게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는 휑한 집에 들어오는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집 안에서의 정적이 너무나 어색했다. 남편이 집에 있더라도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잠시동안 나 혼자 남겨진 집 안에서의 정적이 어색하여 음악을 켜곤 하였는데, 오늘은 아예 빈집에 나 혼자 들어오니 그 정적이 더 어색했다. 공기 자체가 외로웠다. 아이도 보고싶고, 남편에게 먼저 출근하라고 말 한 게 후회됐다.
후회하면 뭐 하리오.. 아이는 떨어져있으면 보고싶지만, 막상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애 좀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라 아이가 어린이집 가 있는 동안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고, 남편도 일찍 출근한만큼 일찍 돌아오거나, 제 때 오더라도 일을 더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면 세 식구 모두 여유로운 주말을 보낼 수 있으니 그 편이 낫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음악을 틀까 싶어 핸드폰을 보는데, 음악도 워낙 안 듣다 보니 뭘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딱히 땡기는 음악도 없다.
“아, 라디오가 있지?!”
한국 살 때는 이소라가 진행하던 정오의 희망곡 이후 (도대체 그게 언제인가.. 99년이다) 에는 딱히 방송을 잘 들은 적이 없었다. 아.. 2009년부터 2시 컬튜쇼를 종종 들으며 박장대소 하기도 했구나. 그랬던 내가 영국 와서는 라디오 광이 되었다. 영어공부를 위한 목적이 컸는데, 듣다 보니 한국과 달리 재밌는 라디오 방송이 많아서 유용하고 재밌었다.
그렇게 라디오를 즐겨 듣던 나였건만, 아이를 낳고는 라디오를 들을 일이 없다 보니 자리만 차지하는 라디오가 결국 창고행이 되었다.
오늘은 바로 그 라디오를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창고에서 꺼내와서 재설치를 한 날이다. 설치라고 해봐야 케이블을 꽂고 안테나 선을 꽂아주는 게 전부이다.
영국에서 유명한 라디오 브랜드인 Roberts 이다. 한때 왕실 라디오 납품을 하던 업체라고 한다.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라디오이다.
이 라디오는 옥스퍼드 살던 시절, 글라스터 그린 (시외버스터미널) 광장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안틱 마켓에서 단돈 3파운드를 주고 건져온 물건! 그 전에는 라디오를 항상 핸드폰이나 아이패드로 듣다가 저 라디오를 산 후 방 안에서 자유롭게 라디오를 들을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던지!
BBC Radio 4도 즐겨 듣고, 클래식 FM, 재즈 방송, 가끔 BBC 옥스퍼드도 듣고, 그냥 음악 나오는 방송을 듣기도 했다.
오랫동안 창고에 처박아둬서 그런가, 튜닝도 잘 안 되고, 소리도 나왔다 안 나왔다 하며 뭔가 명을 다 해가는 기미가 보였다.
그래도 어찌 저찌 잘 조정하니 괜찮은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부엌에 라디오가 울려퍼졌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여유인가!
라디오 뉴스에서 여전히 세상이 돌아가고 있었구나 깨달으며 라디오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어느샌가 라디오는 배경음악이 되어 귀는 닫히고 내 몸은 라디오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 또한 라디오의 묘미일지니! 오랫만에 나의 예전 일상을 회복한 듯 하여 괜히 뭉클해진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 혼자 누리는 이 여유와 행복감에 아이에게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올라온다.
"아니, 나도 이런 여유 누릴 자격 있어.”
스스로를 위로하며 아침을 먹었다.
오늘 아침도 별 입맛도 없었지만 먹기는 많이 먹었다. 입맛이 없어도 많이 먹는 나. 나는 왜 그러는 걸까?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겠다. 아이 데리러 가기 30분전까지 일을 하다 이 글을 쓰고 나니 시간이 다 됐다. ㅠㅠ
그립던 우리 아이, 이제 엄마가 데리러 갈게~
긴 주말, 찐하게 한번 보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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