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실언니 다이어리/결혼

일흔아홉의 시아버지는 신할배

옥포동 몽실언니 2022. 3. 3. 08:00

공부하는 노년

나의 시아버지는 신할배시다. 

틴틴과 결혼하기 전에도 틴틴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버님이 보통 분은 아니라는 느낌이 있었다.   

데이트를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나와 데이트를 하던 당시 틴틴은 요즘 자기 아버지께서 일본어 공부에 열심이시라는 이야기를 했다. 

자기도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서 책을 샀는데, 책만 사두고 공부를 안 하고 있는데 틴틴의 아버지께서는 열심히 하시는 거 같다고 했다. 

아버님께서는 일본어 공부를 왜 하시는거냐 물으니, 그냥 외국어 배우고 싶어서 공부하시는 거라고 했다.  

그 외에도 틴틴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했다.  아버지께서 뭔가 하면 굉장한 수준으로 하신다고.  자기보다 훨씬 꼼꼼하시다고.  또 자기가 보기에 아버지는 머리가 아주 좋으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머리가 자기에게는 오지 않고 자기 누나에게만 간 것 같다고 했다.   

난 다른 건 몰라도 나이가 드셔서 집에서 쉬시면서 뭔가 특별한 목적 없이 오로지 자기 만족을 위해 외국어 공부를 하신다는 아버님의 이야기가 신선했다.  지적탐구를 하는 노후라.  멋있다고 생각했다. 


덕후의 피는 대를 이어 흐른다

틴틴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덕후"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틴틴과 데이트하던 초기, 틴틴이 퇴근 후 쉬면서 저녁을 먹을 때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곤 해서 틴틴은 국제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가보다 했다.

어느날은 틴틴과 통화를 하는데, 틴틴이 신문 기사를 읽고 있다고 했다.  무슨 기사를 보고 있었냐 물으니 터키가 새로운 군용 무기를 샀다고 하는데 그런 기사를 보고 있다고 해서 다른 나라가 무슨 무기를 사건 말건 왜 틴틴이 그런 것에 관심이 있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전하자 후배 SJ가 내게 말했다.  

"밀떡이구만!"

"응? 밀떡? 그게 뭐야? 무슨 떡?"

했더니 그게 아니라 "밀덕", "밀리터리 덕후"라는 말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덕후"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날이었다. 

그리고 나서 틴틴이 하는 가족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아버지도 덕후, 누나도 덕후였다.  덕후는 유전이었다!  

틴틴의 누나를 만나보니 이런!  누나에 비하니 틴틴은 덕후가 아니라 그냥 덕후 흉내만 살짝 내는 수준이었다. 

진정한 덕후가 따로 있었다. 뭔가에 꽂히면 굉장한 수준으로 정신없이 파고드는 덕후!  


온갖 신기한 공구들

우리는 결혼을 했고, 서로의 부모님 댁도 방문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틴틴의 부모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다 2020년 겨울, 아이들과 한국에 가서 시부모님댁에 한번은 열흘, 두번째는 일주일을 머물며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시부모님 댁에서 함께 머무르며 며칠씩 함께 지내며 그제야 틴틴의 부모님, 내 시부모님, 우리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떤 분들이신지 조금씩 보였다. 

무엇보다 분명히 보였던 것은 아버님이 정말 덕후셨다는 점이다!!! 거기에 신할배!!

시댁 제일 작은 방은 아버님 방이었다.  그 방에는 아버님께서 갖고 계신 온갖 신기한 도구들이 가득했다. 

온갖 종류의 공구들은 물론이고, 라벨을 찍어서 출력해내는 기계도 있었다. 

있는 걸 나열하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것 같은 방이었다. 

창가쪽 책상과 한쪽 벽면의 책장 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간이 수납공간이었다.  그 수납공간 하나하나에는 각 공간에 들어있는 물건들의 라벨이 붙어있었다. 

내게는 그 방은 정말 많은 작은 서랍들과 하얀색 라벨이 가득해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드는 방이었다.

공고둘을 좋아하는 잭은 신이 났다.  할어버지 방이 잭에게는 최고의 보물창고였다. 

잭은 늘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리고 모든 서랍을 열어보고, 모든 것을 만져보고 싶어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시부모님댁에 머무는 동안 할아버지 경계 대상 1위가 잭이었다.  아버님은 아버님 방에 있는 소중한 공구들이 망가질까봐 노심초사하셨다.  

여행프로그램 녹화

아버님은 세계 여행 프로들을 모두 녹화하신다.  뭔가 유용한 다큐멘터리가 있으면 그것도 녹화하신다. 

뭘로 녹화를 하시나 했더니 녹화를 해주는 기계가 따로 있었다. 

방송이 끝나면 (아마도) 그 기계를 컴퓨터와 연결해서 DVD로 구워서 모두 수집하셨다. 

직접 가 볼 수는 없어도 이렇게라도 보면 좋지 않냐고, 나중에 모두 너희들 볼 수 있게 해주려고 하는 거라고 하셨는데...  그런 생각도 있으시겠지만, 그냥 그게 좋아서 하시는 일 같았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도 아버님은 수많은 여행프로와 다큐멘터리를 녹화해서 소장하고 계셨다. 

녹화만 하시는 게 아니다. DVD로 구운 후, 각 CD 케이스마다 표지도 직접 제작해서 출력해서 넣으신다. 

출중한 IT 기술들

아버님은 1943년생이시라고 하셨던가.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 옛날 분들은 호적상의 나이와 실제 나이가 같지 않은 경우가 흔해서 아버님 연세가 정확히 얼마라고 하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보다 한두살 많으셨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올해 연세가 최소 일흔아홉, 즉 79세. 아니면 여든, 80세이실텐데.  

그런 우리 아버님께서는 내가 카톡으로 보내드리는 아이들 사진을 모두 컴퓨터로 옮겨서 보관하시고, 아이들 사진을 집에서 직접 출력하셔서 앨범으로도 이미 몇 권을 만들어두셨다. 

핸드폰 화면을 티비로 연결해서 어머님께서 티비 화면으로 손주들 사진을 볼 수 있게도 해주신다. 

아버님께서 어머님께 티비로 유튜브 시청하는 걸 가르쳐드려서, 어머님께서는 주무시다가 밤에 잠이 깨시면 새벽에 거실로 나와서 유튜브로 각종 요리 레서피며, 살림 요령에 대한 유튜브를 시청하셨다. 

나이 드신 우리 어머님께서도 리모컨으로 티비 화면에서 유튜브 검색을 하시는 것을 보고 감탄한 우리는 우리도 못 할 게 없겠다 싶어 영국에 돌아와서 아마존 파이어스틱(Firestick)을 샀다.

파이어스틱을 티비에 연결하기만 하면 티비로 유튜브, 넷플릭스를 모두 볼 수 있었다.  

요즘은 매일 유튜브와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TV로 아이들이 퍼피 구조대를 시청 중이다. 

해외 직구로 쇼핑하다

아버님께서는 우리도 한번도 이용해본 적 없는 알리 익스프레스를 잘 알고 계셨다.  2년전 우리가 아마존에서 싸게 파는 아이들 장난감 드론과 헬리콥터를 샀다고 했더니, 아버님께서 알리 익스프레스에 보면 싼 게 많이 있다고 하셨다. 

"아니, 아버님, 알리 익스프레스는 저도 들어만 본 건데,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계세요?"

아버님께서 알리 익스프레스를 알고 계신 게 신기해서 아버님께 여쭤보았다.  그랬더니, 아버님 말씀.

"왜 이러세요.  나도 유튜브 같은 거 보거든?"

하셨다. 

그러다 얼마전, 아버님께서 한국에 팔지 않고 영국에 파는 코걸이 완화제를 사서 보내줄 수 있겠냐고 부탁을 하셨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아버님께서 뭔가를 부탁하신 일이었다. 

시누나 우리가 한국 갈 때마다 사다드렸는데, 시누도 우리도 한국을 못 가고 있어서 쓰시던 게 다 떨어지신 모양이었다.

소포를 보내려고 보니 통관을 위해 개인통관번호가 필요했다.  그런 번호가 없던 나는 작은 언니의 개인통관번호를 이용해서 언니 이름으로 소포를 보내드렸다.

그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개인통관번호 있는데?"

하시는 게 아닌가!

"아..! 아버님께서도 있으셨어요?  그러신지 몰랐어요.  다음에는 아버님 번호 써서 바로 보내드릴게요!"

개인통관번호는 해외직구를 할 때나 쓰는 것이라 알고 있었는데, 아버님께서도 해외 직구를 종종 하신 모양이었다. 

틴틴은 개인통관번호가 뭔지도 모르고, 나도 최근에야 개인통관번호가 직구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아버님은 우리도 해 본 적 없는 직구를 하신 분이라니!

사진 합성 기술을 배우다

뿐만 아니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적게 된 계기가 바로 이것이다. 

아버님께서 오늘은 급기야 사진 합성 방법을 배워서 한번 해봤다며 우리 잭과 뚱이 사진을 보내오셨다. 

 

첫번째 사진은 우리 잭 벽면 옥외광고!  하하하.  손흥민 사진쯤이 걸려 있을 법한 곳에 우리 잭 사진이 걸려있다.

그리고 두번째 사진은 봄 맞이 세팅인지, 영국에서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꽂 수선화와 이스터 에그 같은 각종 계란밭에서 웃고 있는 우리 뚱이 사진이다. 

와.. 아버님은 언제 또 저런 걸 배워서 해보셨다는 건지! 

매 주말마다 부모님과 통화를 하는데, 지난 주말에는 정신이 없어서 통화를 건너뛰었다.  그런데 이런 사진을 받고서도 전화를 안 드릴 수가 있나!

틴틴에게 부모님께 얼른 전화 드리라고 말을 했다. 

부모님과 통화를 하며 아버님께 여쭸다.

"아버님, 언제 이런 걸 다 배우셨어요?  대단하세요~ 다음에 저도 가르쳐주세요~"

그랬더니,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유튜브에 김원철tv라고 있어.  거기 보면 그런 걸 아주 잘 가르쳐줘.  나중에 시간 나면 너도 들어가서 봐라."

하하하. 

김원철tv를 검색하니 자그마치 5만 6천여명의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이다.  어른들이 따라하기 쉽게 여러 IT 기술들을 가르쳐주는 채널같다. 

아버님은 신할배시다.  나이 여든이 가까우신데, 자식들 도움 하나 없이 본인 스스로 집안 내 모든 IT 를 관리하신다. 

핸드폰 사용은 물론이고, 사진 편집도 하시고, 티비 프로그램도 녹화해서 구우시고, 어머님께도 기기 사용법을 알려주신다. 

참으로 독립적이신 두 분. 

나도 아버님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벌써부터 새로운 걸 배우는 게 피곤하게 느껴지는 나란 사람. 

아직 애들 때문에 잠도 잘 못자고 피곤하고 바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나도 우리 시부모님처럼 건강하고 독립적으로 나이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