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틴틴은 병가를 냈다.
틴틴의 편도가 또 심하게 부었다. 원래도 피곤하고 힘들면 편도가 붓고 피가 나곤 했지만, 저렇게 심하게 부어서 아픈 건 또 오랫만이다. 지난 몇달간 코비드와 그 외에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는 힘들어했지만, 구체적으로 딱 편도선염이 심해진 건 오랫만이다.
새벽녁에 몸이 너무 아파서 아침에 잠이 깨자마자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병가를 냈다고 했다. 어지간히 아파서는 병가를 내지 않는 사람인데. 몇주간 몸이 안 좋아보이더니 결국 저렇게 탈이 났다. 안쓰럽고 걱정된다.
그러나 동시에 나도 정말 힘든데 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라 둘이 이러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참 답답하다.
그렇다고 애들이라도 쌩쌩하냐. 그것도 아니다. 애들도 힘든 상태.
온 가족이 다 아픈 이 총체적 난국!!!!!
이럴 때면 몰려오는 것이 이민자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애환이다.
아프고 힘들면 가족 생각이 절실해진다. 한국의 편리한 마트와 배달음식이 그렇게 부럽다.
이렇게 힘들 때 가족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정말 좋을텐데. 가족이 아니라도 가족처럼 도움 줄 곳이 한 곳이라도 있으면 참 좋을텐데.
그런 생각이 들면 한국에 살더라도 부모님이 안 계시거나, 부모님이 계셔도 육아를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이들도 있는데, 내가 이 나이 들도록 여전히 너무 어리광을 피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 어쩌면 어리광일 수도 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부모님 타령이라니!
남편이 아프고, 나도 힘들고, 애들도 몸이 안 좋고 해서 가족 생각이 나는 거지만, 일단 가족 생각이 들게 되면 한국에 돌아가서 사는 삶을 그려보게 된다. 특히, 우리는 부부가 모두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다 보니 한국에 돌아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가 참 쉽다.
영국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고, 엄마 아버지 도움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고,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사촌 누나 형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상상을 하면 상상만으로도 너무 가슴이 벅차다. 즐겁고 신난다.
그럼 한국에 돌아가면 되지 뭐가 고민이냐 할 것이다.
그러게. 난 도대체 뭘 고민하나. 우리는 뭘 고민하고 왜 돌아가지 못하나.
그 주된 이유는 남편 직장 때문이다. 남편은 좋든 싫든 이 곳에 직장이 있다.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은 2년 남짓. 그것도 십수년 전의 일이다. 남편은 이미 영국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이곳 사회생활에 적응해있다.
물론 그래서 그가 이 곳 사회생활에 매우 잘 적응해서 아주 해피한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직장인들 100% 만족스러운 곳이 있으랴. 쓴 것도 있고 단 것도 있다. 재밌는 일도 있지만, 하기 싫은 일도 있고, 정말 마음에 안 들어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제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까 눈 꼭 감고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 직장생활이라고, 틴틴은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한국에 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틴틴의 나이와 업계의 특성 때문이다.
틴틴이 한국에서 일하던 시기만 해도 IT 업계에서 40대 중후반에 이직을 한다는 것, 더 나은 직장으로 더 높은 연봉을 찾아 이직을 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요즘의 한국 직장이 틴틴이 직장생활 하던 시기와는 정말 다르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틴틴이 현 상태로 한국에 돌아갔을 때 현재와 같은 직장 생활을 은퇴시기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영국에서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65세에 은퇴시기까지 개발을 하다 은퇴하는 이들이 있다. 한국도 20년 후에는 개발자로 평생 일하다 은퇴하는 이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그런 이들이 눈에 보이고, 한국에서는 아직 그런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다 보니 틴틴의 나이에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결정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명목적으로는 틴틴의 나이와 업계 특성을 이유로 들지만, 우리가 진짜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내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으로 가서 아이들을 부모님 도움, 육아도우미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나도 경력을 쌓아나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틴틴의 직장이 좀 더 불안정해지고, 좀 더 일찍 은퇴해야 하더라도 우리 삶을 그럭저럭 잘 꾸려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난 왜 그 선택을 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 경력을 잘 쌓는 것도 좋겠지만, 너무 바쁘게 살아가기가 싫다. 힘들다. 힘들게 일만 하면서 사는 삶을 살고 싶지가 않다.
몇 년만 고생하면 이후에는 좀 더 편안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을 보면 그렇긴 한 것 같기도 하다. 7-8년 고생하면 이후에는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난 그 7-8년의 고생스러운 시간을 겪고 싶지가 않다. 일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삶을 살고 싶지가 않다.
특히, 내 학위를 이용해서 경력을 쌓는다면 그건 연구직인데. 연구직은 밤낮이 없다. 평일 주말이 없다. 연구를 하면 온종일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어디서 어떤 자료를 찾고, 이걸 정리해서 어떤 이야기로 만들어낼지, 내가 찾은 자료와 주장이 옮은 게 맞는지 계속 읽고 곱씹어 생각하고 고민하고 따지고 분석하며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일을 한다.
그렇게 연구에 빠져지내는 삶의 묘미가 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내 연구에만 몰두하는 재미도 있다.
열심히 몰두하고 그 분야에 대해 깊게, 많이 알게 되는 데에서 오는 기쁨도 있다.
그러나 너무 연구만 하고 사는 삶이 이제는 싫다. 연구에만 빠져서 삶을 충분히 되돌아보기 힘든 삶을 이제 그만 살고 싶다. 그런 삶을 오래 산 것도 아니지만, 박사과정을 길게 하면서 공부와 연구로만 가득찬 시간을 길게 보냈는데, 그걸로 이제 그만하고 싶다.
어쩌면 주위에서 내 육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준다면 다시금 내 연구에 재미를 느끼고, 일로서 많은 성취를 해 내는 삶을 즐기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 한국에 가서 이런 저런 도움을 받으면 다시 내 일이 즐겁고 잘 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도 살고 싶다.
그 균형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아직 해답을 못 찾았다.
영국에서의 삶이 좋은 점도 있다. 재미가 없지만 조용하고 평화롭다. 가족과 친구가 가까이 없지만, 평화로운 환경이 있다. 만날 사람이 없지만, 누구도 간섭하는 사람도 없다. 돈이 부족해도 돈 쓸 곳도 딱히 없다. 동네에 살면서 명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볼 일도 없고, 5년째 신발 한 켤레로 동네를 누벼도 내 신발에 눈길 주는 사람이 없다. 외롭지만 자유롭다.
한국은 업무에 압박이 많다. 오늘 일을 주면서 내일까지 끝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간단하고 작은 일이라도 영국에서는 최소한 며칠, 1주일에서 2주일의 시간 말미를 주는 게 보통이다. 1-2주일간은 이미 정해진 스케줄이 있기 마련이므로 갑작스런 요청일 경우 그 일은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처리된다. 바로 바로 응답해주기로 계약한 일이라면 달라지지만, 그렇지 않은 일이라면 저렇게 갑자기 개인의 스케줄을 뒤흔드는 일이 잘 없다.
영국이라도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외국인이라서 사내 정치에서는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는 장점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올라가기 힘든 유리천장이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 같은 외국인들에게는 쉽게 일어나기 힘든 직장 내 급속한 승진이 영국인에게는 일어나는 경우가 좀 더 흔하다. 객관적인 데이터만으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일이 특정 영국인들에게 일어날 때, 그걸 유리천장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영국에서의 삶에 대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가족들과 부대끼는 삶에서 얻는 경험들을 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나도 경력적으로 한국에서와 비슷한 수준의 성취를 기대하지 못한다. 경제적으로도 좀 더 빠듯하다. 정서적으로도 늘 어딘가 아쉬운 상태, 그야말로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상태이다. 유명한 전시와 음악 공연을 많이 본다고 해서 자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좋아하는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채우는 정서적 충만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영어를 잘 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와 같은 입시 압박에서도 자유로울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곳에서 영원히 외국인이고, 영어를 잘하는 만큼 한국어는 한국인들만큼 잘 하지 못 할 것이다. 영국에도, 한국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으로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 입대했을 때 군생활에 적응하기가 더욱 힘들 것이다.
남편이 아프든, 내가 아프든, 육아가 힘들든, 영국에서의 삶이 힘겹게 느껴지면 우린 언제나 한국을 꿈꾼다. 돌아갈까? 갈 수 있을까? 내가 적응할 수 있을까?
남편도 나도 한국에서 보낸 성인기의 두배 이상의 시간을 영국에서 보냈다. 그런 우리가 한국 생활에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이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일까?
영국 내에서 이사 한번 하고자 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인 만큼, 아무리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나라라고 해도 나라를 옮겨 이사를 한다는 것은 정말 더 큰 일이다.
이사를 하면서도 이사 할까, 말까를 몇번이나 번복하게 되는 것처럼, 한국으로의 재이주도 가자, 가지 말자, 가볼까, 가면 지금보다 더 힘들거야,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결국 그렇게 고민만 하고 갈등만 하면서 현재의 삶을 지속하겠지. 그것이 바로 inertia. 관성의 힘이다.
데드라인을 앞두고 있는 이 와중에 난 왜 이 글을 이렇게 장황하게 쓰고 있는 것이냐 하면, 원래 시험기간에 티비가 그렇게 재미있는 법이라...
사실 그건 아니고,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일에 집중이 안 되니. 내 싱숭생숭한 마음을 글로 풀어적다 보면 내 마음도 파악이 되고 정리가 되지 않을까 싶어 이 곳에 다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글로 적고 나니 마음이 좀 정리가 되는 것 같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겁내는가.
적고 보니 그렇게 겁낼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너무 앞을 내다보느라 막막해하지 말고, 그냥 오늘을 살기로 하자. 딱 6개월만 내다보고, 딱 1년만 내다보자. 너무 앞을 다 내다보고 계산하고 그에 맞게 움직이려고 하지 말자. 인생이 어디 우리 생각대로만 되던가. 뚜벅뚜벅 가다 보면 어디론가는 가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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