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실언니 다이어리/나의 해외유랑기

[중3겨울, 호주] 중3 겨울방학, 호주에서 홈스테이를 시작하다

옥포동 몽실언니 2020. 12. 8. 19:39
중학교 3학년을 마친 겨울방학.  나이 만 15.5세.  나 홀로 호주행.  아무리 계획에 없던 즉흥여행을 잘 떠나던 우리 가족이었지만, 그 어린 나이의 딸을 지방 공항에서 바이바이 손 흔들어 보내신 우리 부모님은 다시 생각해봐도 대단하다.  

호주에 도착해서 3주간 함께 지낼 가족을 만났던 날.  안면인식장애라고 의심될 정도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이건만, 호스트 가족 아주머니의 얼굴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고,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주머니의 느낌, 분위기는 기억에 분명하게 남아있다.  

나의 호스트 가족은 평범한 분들이었다.  그 얼마나 다행인지.  해외생활이든, 타지생활이든 하다 보면 그 속에서 평범한 이들을 만나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고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된다.  도저히 내가 생각하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 생각보다 많은데, 인간관계가 협소하고 제한된 해외생활이나 타지생활에서는 그런 사람들과의 접촉이 가져오는 여파가 평소보다 더 크고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네는 딸 둘, 아들이 하나 있는 이민자 가족이었다.  아주머니께서는 이마에 빨간 점을 찍고 계신 힌두교도였다.  가끔 그 집에서는 알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소리도 들렸다.  아주머니는 인도 출신이었으나 아저씨는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아이들은 동그리한 얼굴에 머리카락 색깔도 밝았다.  아주머니도 인도 출신 치고는 말수가 적은 편이셨다.  가족이 전체적으로 차분한 느낌이었는데, 그 점이 나로서는 적응하기에 더 편했던 것 같다. 

그 가족 중에서 아침 식사를 가장 빨리 하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도착한 날은 아이들 방학 직후였던 것 같다.  당시 내가 쓸 방은 아주 깔끔하게 준비되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내 방을 준비해주느라 그 집 아이들의 방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내가 온 후 며칠 후 아이들이 자기들 방에 나를 초대해서 가봤더니 방 한 가운데 책장이 놓여있고, 바닥에 매트리스가 엉망으로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아이들에게 미안하면서도, 이렇게 해서라도 이 집의 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을 보면, 중 3, 고1 입학 시기 쯤만 되어도 아이들도 알건 다 아는 것 같다. 

아주머니는 매일 아침 나에게 오븐에서 구운 토스트와 이상한 꿀꿀이죽과 바나나를 내어주셨다.   당시의 나에게는 겨우 식빵 한두장 굽기 위해 그 큰 오븐을 매일 아침 돌리는 게 참 에너지 낭비같아 보였다.  그러면서도 오븐에서 식빵이 따뜻하게 구워지는 냄새가 나면 그게 그리 고소하고 좋았다.  매일 아침 가족들 중 나 다음으로 가장 먼저 일어나서 잠이 덜 깬 부스스한 상태로 나를 위해 아침을 준비해주시는 아주머니가 항상 참 고마웠다. 

아줌마가 내어주시는 음식은 중 볼에 담긴 것은 따뜻한 죽 같은데 단맛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기 힘든 정체모를 하얀 수프에 바나나까지 넣어주셨다.  처음에는 정말 ‘우웩’할 뻔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바나나는 내가 유일하게 싫어하는 과일이었다.  이상한 죽에 내가 싫어하는 바나나까지 들어가다니!  

그렇게 매일 아침 똑같은 음식을 내어주시면서도 아주머니께서는 내게 하루도 빼먹지 않고 물으셨다. 

“How do you like it?”

이라고.  잊을 수 없는 문장. 

맛 없어도 투정하지 말고 감사히 먹고, 먹기 싫어도 끼니 때에는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배운 나는 아주머니께서 물으실 때마다 항상 맛있다, 좋다고 대답하며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었다.  그게 내가 배운 식사예절이었으니까. 

그리고 항상 궁금했다.  매일 같은 음식을 주면서 왜 매일 어떠냐고, 먹을 만하냐고 물으시는 걸까.  맛 없는데 맛 있다고 매일 거짓말하기도 곤혹스러운데.  그만 물으시면 안 될까 하고.  그러면서도 매일 저렇게 물으시는 저의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머니는 그야말로 "How do I like it"이 궁금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그 이상하게 느껴졌던 꿀꿀이죽은 점차 고소하고 맛있게 느껴졌다.  그 죽의 따뜻한 온기가 몸 안으로 들어오면 잠에서 덜 깬 내 몸이 따뜻하게 감싸지는 느낌.   심지어 나중에는 너무 맛있게 느껴져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음식인지 여쭤보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호주에서 돌아오는 그 날까지도 그걸 묻지 못했다.  그건 김포에서 호주로 가던 장거리 비행을 하며 화장실을 쓰지 못했던 것과 같은 이유였다.  중3의 사춘기 여자아이에게는 그걸 묻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후 영국으로 유학와서 마트에 진열된 오트밀 박스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서야 그게 내가 호주에서 매일 먹었던 꿀꿀이죽, 오트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머니와 나는 그렇게 매일 아침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사실 좀 어색한 시간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영어를 늘리고자 적극적으로 말을 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고, 아주머니도 그런 나를 위해 어떻게든 말을 걸어보려고 애 쓰는 분도 아니었다.  그래도 한 두가지 질문은 해 주셨던 것 같은데 그것 또한 참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수줍음이 극에 달해 있던 나는 늘 속으로 '제발 이 질문이 마지막이기를',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말아주세요'라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열다섯의 나는 그런  어색한 상황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상황에 나를 데려다 놓으면 나는 여전히 어색해하며 말을 이어가지 못할 것이다. 

아주머니는 매일 아침 늦잠 한번 하지 않고 제때 일어나서 어학원에 갈 준비를 하는 나를 기특해하셨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찌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왔던 두 명의 꼬맹이들은 호주에 와서 쇼핑몰에서 장만한 게임기로 매일, 밤늦도록 시끄럽게 게임을 하고, 아침마다 늦잠을 자서 학원에도 지각했다.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호스트 가족으로부터 학원으로 컨플레인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에 비해 나는 방을 어지럽히지도 않고, 집에서 시끄럽게 하지도 않고, 그 집 아이들과도 곧잘 어울리는 얌전한 아이였다.  특별할 것도 없지만 유별스러울 것도 없던 나를 아주머니께서 좋게 봐주셨던 것 같다.  

그 아주머니가 기억에 이리 남는 것은 내 생애 첫 호스트가족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그 아주머니께서 내게 “인종주의”가 뭔지 그에 대한 인식을 처음으로 심어주신 분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