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실언니 다이어리/한국 정착기 2020.11-2021.02

육아가 주는 불가피한 우울감, 그리고 타인의 육아와 내 노동의 맞교환

옥포동 몽실언니 2020. 12. 24. 13:55
지난 2주간의 시간.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나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육아가 그렇다.  하루 종일 쉴틈없이 애들을 돌보며 바쁘게 지내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면 그 시간이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그저 세월만 가버린 것 같아 허무하게 느껴진다. 그 시간 안에는 분명히 아이들을 돌보느라 고군분투하던 나의 애씀이 있었고, 그 시간이 만들어낸 아이들의 성장이 있었으며, 그 시간 속에서 오갔던 나와 아이들간의 교감이 있었건만, 지나고 보면 그 모든 시간이 없던 시간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마법이 육아에 있다.  그 시간이 내가 다 날려버린 시간 같아 공허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달갑지 않은 마법. 

엄마들은 아이들과 함께라 행복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끔은 우울해진다.  아니, 적어도 나는 가끔 우울해진다. 나만 멈춰있는 것 같고, 나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 같다.  나는 분명히 우리 가족에게 엄청난 노동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내 노동이 아무 가치가 없어보인다.  남편도 늘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아이들도 내게 다가와 혀 짧은 소리로 “아랑해”라고 말해주기도 하는데, 그것도 순간의 기쁨을 뿐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허무함이 몰려온다.  

그건 바로 내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일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아이들에게 밥을 제공하고, 빨래를 돌리고, 아이들의 장단에 맞춰 짝짝꿍만 하다가 다 늙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남들은 어디서 뭐다 하고 일하며 자기만의 성취를 해나가는데, 나는 계속 그 자리에서 애들 뒤치닥거리만 하다가 꼬부랑할머니가 되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애들 뒤치닥거리만 하다가 꼬부랑할머니가 되면 그게 어디가 어때서.  그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그것도 큰 기쁨이자 큰 행운이다.  가끔 허무하고 우울하기는 하지만, 육아가 주는 기쁨과 보람이 분명히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계속하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도대체 왜 나는 전업주부로 남기를 두려워하는가?  

내 일이 없음이 주는 불안 때문이다.  
내 일이 없어서 생기는 경제적 공백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제적 공백에 대한 불만족 때문이다.  

사회를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린 이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고 있고, 사회가 내게 강요한 가치와 사회가 만들어낸 프레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릴 때부터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고, 똑같이 교육받고 누구나 능력에 따라 성취할 수 있으며, 인간에게 있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실하게 실현해낸 이들을 칭송하는 사회.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교는 매년 나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어오지 않았던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 모두 다 똑같은 엄마이고 마는 것을.  임신과 출산, 육아에 따른 경력단절은 여자의 몫이 되고 마는 것이었건만.  그럴 거면서 뭣하러 그렇게 남녀평등이니, 자아실현이니, 꿈이니 이런 것을 가르치고 강요했던 것인가.  심지어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일을 하며 살 수도 없는 것을 (우리 칼리지에서 일했던 한 폴란드 친구도 그랬다.  자기도 어릴 때 이렇게 자기가 남에 나라, 남에 칼리지에서 커피나 나르고 테이블이나 닦는 걸 꿈꾸지는 않았다고). 

내 일이 없음이 주는 불안은 무엇인가?  주위 많은 친구들이 아이를 낳고든, 낳지 않고든 열심히 자기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이만 돌보고 있는 나는 멈춘 것 같이 느껴진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몸이 고되고 육아일상의 반복이 지겨워질때면, 나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위 사람들의 행보만 성공적으로 보이고, 멋있어 보인다.  엄청나고 대단해 보인다.  

사회는 내게 경력단절도 더 이상 큰 장애가 아니라고 말한다.  경력단절을 딛고 성공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사화하고 영웅화한다.  대단한 일이다.  실제로 경력단절로 인해 취업시장에서 불이익이 있을 수 있는 여성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도 늘어난 것 같다.  그건 분명히 긍정적인 변화다.  그런데 무엇이 “성공”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경력단절을 딛고 성공한 이들이 무엇을 희생했는지, 그 희생의 대가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모두들 내게 나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남들이 다 해도 나는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육아가 반복되는 생활이 그렇다.  육아와 살림만 하다 보니 그 외의 일은 더 이상 하지 못할 것 같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지금만 그런 게 아니라, 영원히 그럴 것만 같다.  아이들 기저귀 갈고, 아이들 밥을 먹이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단순한 일 외에는 더이상 그 어떤 일에 대한 능력이 다 사라진 것 같다.  심지어 내 아이 밥 먹이고 기저귀 가는 일도 너무 힘이 드는데, 그런 내가 어디 가서 뭘 할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경제적으로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남편의 외벌이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불안?  남편의 외벌이로 먹고 사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겨우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도 경제적으로 좀 더 풍요롭고 싶은 욕구가 있다.  아이들 대학 학비도 내가 줄 수 있으면 주고 싶다.  어릴 때는 당연한 줄 알았던 것이 부모가 되고보니 그렇지 못해서 면목이 없다.  아이들 대학학비 마련이 내 경제적 꿈이 될 줄이야.  경제적 풍요에 대한 욕구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욕구이다.  늘 적당히 있었기에 크게 갈구해본 적 없던 욕구였다.  마음 속에 있었을지언정 그게 이렇게 성취하기 어려운 것일 줄 몰랐던 욕구, 나이 마흔에서야 처음으로 직시하게 된 욕구이자 현실이다.  난 아직 노동시장에 발은 커녕 발톱조차 넣지를 못했는데, 더이상 자신의 벌이로 자신이 살 집 한 칸 마련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워져버린 현실.  얼마나 성실히 일을 하는지가 아닌, 어떤 직종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로 개인의 노동소득 수준이 달라지고, “어디"에 “어떤 집"을 “언제” 장만했는지로 부가 나뉜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작금의 현실이 되어 있는데, 나는 나이 마흔에 아이 둘을 데리고 부모님 댁에 더부살이하며 부모님의 잔소리와 간섭을 받으며 응석받이 노릇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고 아이들과 교감하며 안분지족하고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지금도 그런 삶을 사는 내 모습을 꿈꾼다.  그렇게 살면서 행복할 수는 없을까 하고.  그러나 문제는 내가 팔랑귀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이다.  다들 내가 직접 애들을 키우지 않아도 애들은 잘 큰다고 하고, 애들이 다 크고 나면 내 일이 없는 게 후회될 거라고 하니, 내 몸 속에서 꿈틀대는 것을 억누르려 애 쓰는 욕망이 그런 말만 들으면 출렁거리며 일어난다.  내 일을 안 하면 지금 간혹 느끼는 이런 육아 우울감이 이십년 후에 더 커져서 나를 집어삼키면 어쩌나 겁도 난다.  나도 내 일이 있고, 내 돈벌이도 하면서, 내가 번 돈으로 이리저리 인심도 쓰고 살고프다.  내 일이 있어야만 이 사회에서 한 몫 하는 것 같은 프레임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경제적 능력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회는 분명히 잘못되었지만, 나도 내 경제적 능력으로 내 가치를 증명해보이고픈 욕망이 있는 모순덩어리!

그리하여 그런 저런 고민 끝에 일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어떤 정해진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 혼자 뭐라도 해보기로 마음 먹은 것일 뿐이다.  전업육아를 내려놓고 내 시간을 가져보기로, 내 일을 만들어보기로 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 시점이 하필 코로나 정국이라니!  코로나가 더욱 만연해있는 영국에 돌아가서 아이들을 봐줄 사람을 구해야 하는 현실.  차일드마인더도 찾아보고, 내니도 찾아보며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내니를 쓰면 연간 4천만원 이상이 들고, 차일드마인더를 쓰면 4천만원 가까이가 든다.  영국의 보육이 그렇다.  내가 전업으로 열심히 벌어 내가 버는 돈을 모조리 차일드마인더에게 넘겨주고, 남편 벌이에서 남는 생활비에, 우리 저축까지 까 먹어야 한다.  그렇게 계산하니 실컷 돈 벌어서 타인의 육아를 사는 것이다.  내가 낳고 싶어서 낳은, 이제는 내 몸보다 더 소중한 내 사랑하는 아이들이건만, 그 아이들을 돌보는 행위를 타인에게 사야 한다.  내 노동 전부에 웃돈까지 얹어서.  도대체 왜 나는 내 아이를 내가 키우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내가 키울 수 없는가.  

그런 점에서는 무상보육이 자리잡은 한국의 제도가 참 좋다.  대단하다.  어떻게 이 재정으로 이렇게 운영하나 싶을 정도로 대단하다.  보육교사 인건비와 보육시설 관리운영비를 최소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보이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한국에 남지않고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나 코로나 상황에 있어서는 더더욱 영국이 위험천만한 곳인데!  그 이유까지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남겨둔다. 

사진: 큰언니가 찍어준 사진.  세상 어느 누가 내 아이만큼이나 내 몸에 저리 편하게 기댈 수 있을까.  그렇게 느끼는 순간이 육아가 주는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