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실언니 다이어리/일기

[영국유학] 박사를 한 것이 후회되었던 날..

옥포동 몽실언니 2019. 12. 5. 00:40

사진: 옥스퍼드대학 학위수여식 후 식장 밖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학위수여식 참가자들


이번 여름, 드디어 미루고 미룬 졸업식을 치렀다.  

3년전에 논문 심사를 마치고, 간단한 최종 수정 후 심사 후 석달 뒤 논문이 정식으로 통과되었으며 학위과정이 모두 끝났다는 공식 편지를 받으며 나의 학교 과정은 모두 끝이 났다. 

학교마다 규정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영국에서는 학위 과정이 끝난 후 정해진 떄에 학위식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편리한 때에 학위식을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학교들이 많다.  옥스퍼드는 연중 여러번에 걸쳐 졸업식이 이루어지는데, 졸업생은 그 중 하루를 정해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다.  그리고, 학위과정이 끝난 해가 아니더라도 몇년 후에라도 언제든 본인이 원할 때 학위식에 참석할 수도 있다.  학위식 참석을 원치 않을 경우, 혹은 참석할 상황이 되지 못할 경우에는 “불참”으로 학위식에 참석할 수도 있다.  “불참”으로라도  학위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학위식에 참석할 경우에만 해당 학위 타이틀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학교의 규정 때문이다.   그래서 내 논문이 최종적으로 학교 도서관에 제출이 되고 나의 학위 과정이 끝났다는 공식 문서가 발행되고 나서 나의 지도교수님은 곧바로 나를 “닥터 리”라고 불러주셨지만, 학교의 규정을 따르면 졸업식에 참석하기 전까지는 “닥터”라는 타이틀, 옥스퍼드에서는 “DPhil (디필)”이라 부르는 그 타이틀을 쓸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갑자기 이렇게 때 아닌 졸업식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저께 집앞에서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이 기나긴 시간과 젊디젊은 시절의 모든 에너지를 박사학위에 바친 것이 후회되는 서글픈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나 도대체 박사 왜 한 거야?’ 라든지, ‘박사 괜히 했어!’ 등의 생각이나 이야기는 곧잘 가볍게 지나가는 소리로, 괜한 하소연으로도 종종 친구들이나 틴틴에게 하기도 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제처럼 정말 진정으로 나 박사 괜히 했다는 생각을 해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계기는 참 우습다.  다른 것도 아닌, 그저 “돈” 때문이었다.  이웃들과의 경제적 비교 탓. 

앞집 제니퍼네는 이번 여름 집을 팔고 현재 집의 1.5배는 되는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했다.  그러다 본인들이 사고자 했던 집이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부르는 바람에 이사를 접었다고 했는데, 얼마전 멀쩡하던 차를 처분하고 벤츠 신형 새차를 구입했다.  그리고, 보름 뒤면 영국 중산층의 상징이기도 한 골든 리트리버를 집에 들인다고 했다.  

때 마침 남편의 친한 직장 동료도 이사를 간다며, 우리에게 아이가 더 이상 쓰지 않는 육아용품을 몇가지 주겠다고 했다.  이들도 지금 사는 집은 이미 대출도 2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 집을 팔고 차고가 2개나 있는 큰 집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점심 시간에 남편과 이 동료는 종종 함께 달리기를 하는데, 이 동료가 새로 이사갈 집을 달리기를 하면서 보여준 적이 있다고 했다.  틴틴의 말에 따르면 동네도 좋고 집도 크고 아주 좋더란다.  

우리 골목에서 나이가 일흔이나 되는 앞집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부들이 맞벌이를 하고 있다.  아이가 어린 집은 어린집대로 엄마가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고, 아이가 좀 더 자라면 풀타임으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집의 경우 내가 나름 일을 한다고는 하고 있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정기적인 일이 아닌 탓에 소득도 들쭉 날쭉하고, 일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과 체력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하는 일의 양도 많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약한 나와 남편은 현실에 허덕이며 모든 생활을 최소한으로만 하고 살아간지 어느덧 2년이다.  

이런 와중에 어제는 때 아니게 이웃들의 나이까지 모두 알게 되고 나니, 이 골목에서 어린 자녀를 둔 가족들 중 부모의 나이가 가장 많은 집이 바로 우리집이고, 부부의 합산 소득이 가장 적은 집도 (거의 확실히) 우리 집이며, 그 와중에 또 둘째 아이는 태어나서 앞으로 몇년간 올해보다 가계 사정이 더 많이 어려워질 집도 우리집이었다. 

앞집 제니퍼가 서른여덟이라며 자기 나이를 밝히면서, 이이가 우리 남편과 같은 직장에서 일한지가 어느새 십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 오랜 시간동안 일을 하며 경력을 쌓고 돈을 벌고 저축을 했다고 생각하니, 만 나이 서른아홉, 한국 나이로는 마흔이 넘는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된 고정수입을 일년이상도 가져보지 않은 내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박사를 하는 동안 ‘박사과정’은 타인과의 비교대상이 아니며, 그것은 마치 개인의 인생이 비교대상이 아닌 것과 같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는 시간이었는데, 눈 앞에 이웃들이, 또 남편 동료들이 그간의 경제적 활동을 기반으로 우리 부부와 비슷한 혹은 더 어린 나이대에 우리 보다 한발 앞서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니 눈앞에 보이는 비교대상에 나도 모르게 쉽사리 무너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며 자기 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경제적 독립체로 정신적으로도 독립해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나.  

박사는 왜 해 가지고서. 

돈은 돈대로 쓰고, 젊음은 젊음대로 버리고,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텅 빈 통장과 부모님의 휘어버린 허리와 저질 체력 뿐이라니.  

아이 욕심에 둘째를 덜컥 가지기는 가졌는데, 앞으로 두 아이를 키워낼 것을 생각하니 어떻게 가계를 꾸려야 할지, 나의 경제활동은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첩첩산중에 고민을 해도 해도 답이 없다.  당연히 현재 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당장의 답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도 그 상황과 이 현실이 답답하고 서글펐다. 

어제 저녁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나 정말 박사 괜히 했다고.  틴틴은 어쩌자고 가진 거라고는 학위 밖에 없는 나같은 사람과 결혼 한 거냐고.  영국에 번듯까지도 아니더라도 안정된 직장이라도 하나 있는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당신의 생활도 더 편하지 않았겠냐고.  

묻고 나니 예전에 틴틴이 한 말이 생각났다.

“다 끼리끼리 만나는 거야~” 

라고. 하하.  그 때는 너는 왜 이리 체력약한 나랑 결혼했냐고 했더니,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본인의 약한 체력을 이야기하며 우리 둘이 끼리끼리 잘 만난 거라며 나에게 했던 이야기였다. 

나의 하소연에 틴틴이 말했다. 

“아니야, 걱정하지마.  몽실 너는 ‘문화자산’을 가지고 있잖아!  그게 다 문화적 자산이라고!”

푸하하.  틴틴의 위로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거 몽실 니가 한 이야기잖아.  우리가 우리 아이에게 물려줄 것은 문화적 자산밖에 없다고.”

“그래? 내가? 내가 그런 소리를 했어?  내가 제 정신이 아니었나 보네!”

개구쟁이 잭의 방해로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중지. 

문화적 재산이라니.. 아마 내가 문화적 자본, 소셜 캐피탈.. 뭐 이런 뜬금없는 소리로 우리의 상황과 사정을 좋게 생각해보려고 애 쓰며 만들어낸 이야기를 틴틴이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아무튼 그렇게 어제는 박사 괜히 했다, 박사는 정말.. 연구를 아주 아주 진심으로 사랑해서 평생 연구에 몸바치고 싶은 사람들이 해야 하거나, 경제적으로 큰 걱정 없어서 자신의 젊은 시절 몇년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공부에 몸 바쳐도 되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보았다.  

공부한 것 자체,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일들과 사람들과의 교류, 독서와 사고, 논문 작성 등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는 배웠다.  박사를 하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은 배우기는 배운 것이다.  그런데... 그게 밥 먹여 주냐구요..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당장의 경제적 어려움 앞에서 토론, 비판적 사고, 비판적 글읽기, 논리적 글쓰기, 독립적 연구..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ㅠ 

이렇게 말하면 당장 아주 큰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 같지만, 아주 그런 것도 아니면서 이런 하소연을 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통계적으로도 자녀 나이가 어릴수록, 특히 영국 통계상에서는 자녀가 학령기 전 아동일수록 부부가 맞벌이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빈곤한 경우가 가장 많다.  나는 지극히 통계적으로 평범한 상황에 있는 것일 뿐인데, 아이를 키운지 2년이 다 되어가도록 내가 싱글 성인에서 자녀를 키우는 한 가정의 엄마, 남편 외벌이에 엄마는 간단한 알바로 간간히 소득을 겨우 올리고, 그마저도 그 소득의 대부분을 아이 어린이집 비용에 투입하고 있는 아주 평범한 가정의 엄마일텐데, 나의 이 평범성이, 이 보통성이 아직도 내 현실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다. 

엄마가 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엄마”라는 상황변화에 잘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인데, 2년이 다 되도록 나는 여전히 그에 적응하지 못한채 현실과 이상, 현실과 욕심, 현실과 야망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중인가보다. 

엄마 되기.  새로운 역할, 새로운 자리, 새로운 삶의 지평에 적응하기.  여러 모로 참 쉽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