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하는 삶/육아일기 2017-20

[육아일기] 아이를 키우며 감사한 일: 아이 덕분에 내 가치관을 점검하고 반성하다

옥포동 몽실언니 2020. 1. 7. 18:49
아이를 키우며 감사한 일.. 이라 제목을 쓰고 보니 아이를 키우며 힘든 일이 먼저 떠오른다는 이 아이러니는 무엇일까! 

얼마 전,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 일이 있어 오늘은 그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그것은 바로 자녀교육에 대한 고민으로 내 가치관을 점검하고 반성하게 되면서, 이런 반성을 할 수 있게 해 준 육아의 경험, 우리 아이의 존재가 더 없이 감사했던 일이다. 

아이를 키우며 거기서 얻는 행복과 감사함을 크게 느끼기는 하지만, 힘들고 지치는 일상이 육아 전체에서 더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행복과 감사의 순간은 드문드문 일어나고 짧은 찰나로 지나는 경우가 많지만, 그 강도가 세고 여운이 강하다 보니 그 강렬함으로 인해 마음에 길게 남기 때문인 것 같다. 

지난주, 후배 가족네에 잠시 놀러 가서 아주 잠깐이지만 육아와 자녀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서로 아이가 있다 보니 아이를 보다, 밥을 먹다, 대화를 하다, 또 아이를 보기를 반복하느라 차분히 앉아서 연속성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어떤 아이가 되도록 도와줘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후배는 아이가 자신의 주어진 상황에 감사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그것에 나도 적극 동감하며 나의 고민을 함께 털어놓았다.

어떤 상황이든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키우고 싶으나, 내가 살아온 세상보다 경제적으로 더 힘들고, 경쟁적으로도 더욱 치열하고, 노동시장의 구조도 더욱 더 양분화되어 있고, 기술시직의 양극화도 더욱 큰상황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 아이들인데, 그런 점을 생각하면 내가 성취한 것보다 더 성취하기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아이에게 내가 어떻게 매사, 매 상황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의 고민을 털어놓기 무섭게 잭이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나를 식탁에서 끌어내렸고,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자리에 앉아있던 후배 부부는 그 화두로 대화를 계속 이어갔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후배 부부의 생각을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움을 남긴 채 그날의 모임은 끝이 났다.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겠지만, 내가 꺼낸 고민과 문제의식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며 내 고민, 내 질문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내 이야기 속에는 어느 정도 (=내가 기대하는 정도)의 성취를 하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노동시장에서도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자리에 있어야 감사하고 행복한 삶이 가능할 거라는 전제가 깔린 질문이었다.  그 전제는 잘못된 전제이므로 결국 내 질문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저 내 안에 있는 나의 미충족된 욕망이자, 내가 갈망하는 욕망의 투영일 뿐.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성취중심주의, 성과중심주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갈망이 내 무의식 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아이를 재우고 양치를 하며 그 생각에 다다르자,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내 아이가 그런 조건 (성취와 부) 없이도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키울 수 있겠냐는 질문은, 그런 것 없이 나는 어떻게 내 인생을 감사해하고 행복해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왔다.  결국 아이를 키우느라 노동시장에서의 지위와 성취가 없는  현재의 나의 삶, 앞으로 두 아이를 양육하며 더욱 타이트해 질 우리집의 가계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감사하고 행복해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그에 대해 아직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 내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아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돌아왔다.  

'아이 덕분에 내가 이렇게 또 다시 내 인생, 내 가치관, 나의 잠재의식을 마주하고 반성하게 되는구나.. 아이가 있어 참 행복하고 감사하다.’

내가 기대하는, 혹은 내가 누리고 산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성취 없이는 아이가 행복하기 힘들 거라고 전제했던 나의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물론 이런 자기 인식과 반성은 아이를 키우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고, 아이를 키우기 전에도 ‘성취나 부’에 종속된 삶이 얼마나 개인을 괴롭게 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내 안에 박혀있는 성취와 부에 대한 갈망의 원인을 찾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나의 소망이자 오랜 고민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그 고민과 그에 대한 해결이 더 절실해진다.  나 스스로가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나도 모르게 아이를 억압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아이를 그런 물질적 가치로, 성과와 성취의 정도로 압박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경제적 풍요, 사회적 성취 같은 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과의 비교를 통해 측정가능한 것인데, 남과의 비교는 필연적으로 불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내가 우주 최고, 최상이 아니고서야 어디든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널리고 널린 게 이 세상이니까.  그러므로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삶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진정으로 감사할 수도 없다.  늘 조건부 감사, 조건부 행복만 있을 뿐.  언제든 전복이 가능하다. 

내가 살아온 세상보다 더 터프한 세상 속에서 남과 나를 비교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태도가 중요할 것인데, 어떻게 하면 그런 아이로 키울 수 있을까..

사랑. 
인정. 
응원. 
격려.

바로 생각나는 것들은 이 네 단어이다.  아이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주고, 아이가 잘 하는 것을 인정해주고, 아이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해주고, 아이가 무언가에 도전할 때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잘 되지 않았을 때도 충분히 격려해주는 것.  그 외에 또 뭐가 있을까?  계속해서 고민해볼 일이다.  

아직은 아이가 어려서 있는 그대로의 아이 모습에 감탄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운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서 또래집단과의 생활을 시작하고, 무언가 학습하고 평가받는 시기가 되어서도 계속해서 이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이의 성취 수준에 관계 없이 아이를 압박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복돋아주면서도 아이에게 올바른 삶의 태도를 잘 가르칠 수 있을까.  

'부모 되기' 란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아이를 키우며 나에 대해, 내 인생에 대해, 아이의 인생에 대해, 삶의 가치에 대해, 내가 미치게 될 아이에 대한 영향에 대해 깊게 반성하고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나를 이런 고민으로, 반성으로 이끌어주는 아이에게, 아이의 존재에 대해 더욱 더 감사하다.  

사진: 요즘 베개 베고 이불 덮고 자는 재미에 푹 빠진 우리 아이.  잘 때만큼은 천사도 이런 천사가 따로 없다!